서구 몰락의 예언자, 역사와 철학을 넘나들며 맹위를 떨친 슈펭글러의 전위적 사유를 읽는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당시, 시대의 징후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서구 문명의 몰락을 예견했던 독일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역작『서구의 몰락』이 책세상문고·고전의세계 69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시대 및 역사를 직관하는 힘이 돋보이는 역사철학서이자 문명비판서로서 1918년에 제1권이, 1922년에 제2권이 출간됨으로써 그 분량의 방대함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슈펭글러는 “문명이란 한 문화의 불가피한 종결이며 운명”이라고 선언하면서,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대 서구의 상황이 발전의 정점에 이르렀다가 곧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던 옛 그리스?로마 문화가 보여준 양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서구 문화의 ‘종결’을 예언했다. 이로써 당시 서구 사회를 경악시키고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가장 격렬한 학문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은 역사와 철학 분야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전위적인 사유를 전파하는 독존적 사상가로서 슈펭글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번 책세상 번역본은 서구의 단선적·단계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역사를 살아 있는 하나의 문화 유기체로 파악한 슈펭글러의 핵심 사유와『서구의 몰락』 집필 의도가 고스란히 담긴 1918년 초판 제1권 머리말과 1922년 개정판 머리말, 제1권 서론 그리고 슈펭글러만의 독창적 인식이 담긴 세계사 연표를 함께 번역해 묶어냄으로써,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너무 방대해 접근하기 어려웠던 슈펭글러 사상의 단초를 확인하게 해준다.
왜 서구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가, 그 영원한 역사순환론
서구는 반드시 몰락할 수밖에 없다던 슈펭글러의 강성 발언에 당시 서구 사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제국주의의 확산, 그로 말미암은 세계대전의 참상은 ‘깨어 있는’ 서구인들로 하여금 자신들 문화에 대한 자성과 비판을 불러왔다. 진리를 알고자 하며 또 추구하는 한 사람의 사상가로서 슈펭글러는 “사상가란 자신의 직관과 이해를 통해 시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도록 규정된 사람”(19쪽)이라고 정의하면서, 인간이 현재 존재하는 것들의 근본 원리를 모순 없이 통찰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사상가는 자신에 의해 자신의 세계상으로 태어난 것을 진리로 여길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사상가는 자기 내면에서 발견하는 상징적 본질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자신의 진리를 천명할 때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학자들의 학문하는 방식을 비판하며 ‘관념론의 허공의 뜬 새와 같은 철학’이 아니라 인생의 엄숙함, 그 안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참된 본질을 통찰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공소하게 들리지 않는 까닭은 “진리는 어떤 특정한 인간에 대해서만 진리가 된다. 따라서 나의 철학 자체도 단지, 이를테면 고대의 정신이나 인도적인 정신이 아니라 서양적인 정신만의 표현이며 반영일 것이다”(107쪽)라는 진단을 스스로 해냈기 때문일 터이다.
이렇듯 사상가로서 염결성을 지니기도 했던 슈펭글러는 하나같이 놀라운 발언들을 이어가면서 서구 문명, 서유럽에만 한정되어 있는 근대를 통렬히 비판했다. 제국주의, 세계대전, 사회주의 혁명 등 혼란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서구는 고대-중세-근대로 올수록 진보한다는 그들만의 발전사관에 따라 타 문화들을 미개한 단계로 규정하면서 그들 문화의 폭력적 팽창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목도하면서 슈펭글러는 문화란 발생, 성장, 노쇠, 사멸의 과정을 밟는 유기체와 같아서 이미 고도성장을 이룬 서구 문화는 필연적으로 사멸, 몰락에 이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즉 당시의 서구가 문화 발전의 최종 단계 즉 ‘문명’의 양상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소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물론 그 소멸은 다시 탄생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 구조를 따르게 되지만, 이를 여유 있게 통찰하기 어려웠던 당대 서구인들에게 슈펭글러의 주장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괴테와 니체의 진정한 후계자 슈펭글러, 세계사의 전체상을 제시하다
현대에 닥친 커다란 위기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정치인이나 공론가나 시류에 편승하는 도덕가들처럼 어떤 ‘입장’의 한 귀퉁이가 아니라 무시간적 차원에서 수천 년에 걸친 역사적 형식 세계, 즉 세계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슈펭글러. 서구의 직선적 발전사관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의 역사, 그 구조를 통찰할 것을 제안하면서 그는 그 일환으로 ‘역사순환론’과 ‘세계사의 비교형태학’을 내벼웠다. 이 방법론들은 ‘역사란 문화라는 자족적인 개별 단위의 연속’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존재하는) 세계의 형식 언어로서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다양한 문화들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비교, 통찰하고 나아가 부분의 역사가 아니라 전체의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의 본질 및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자연과의 대조 및 대립도 마다하지 않았던 슈펭글러는 결과적으로 “영원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철학은 해당 시대의 표현이며, 해당 시대만의 표현이다”(97쪽)라는 그의 상대주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직관하며 철학으로서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했다. 이는 그가 1922년 개정판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거니와 괴테와 니체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괴테에게서 방법을 배웠고 니체에게서 문제를 얻었다”(22쪽)라고 고백했는데, 인류 문명의 운명을 비관하면서 문화의 보편성과 모든 도덕적 가치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전망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는 니체를, 인류의 역사란 생물체로서의 의지나 목적이나 계획 없이 정해진 과정을 그대로 밟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유기체이자 출생, 성장, 노사의 과정을 겪는 생물 유기체와 같다고 본 점에서는 괴테를 각각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유 면에서는 누구보다 전위적이었지만 연구 방법에 있어서 객관적 비교형태학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니체의 방법적 한계를 괴테의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 극복한 것이다. 이로써 슈펭글러는 서구 근대의 역사에서 입지전적인 두 사상가를 독창적으로 계승, 발전하면서 세계사 전체상을 조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놓았다.
『서구의 몰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슈펭글러는 제1권 서론에서『서구의 몰락』의 집필 목적이 좁게는 당시 전 지구상에 퍼져 있는 유럽?아메리카 문화의 몰락 양상을 분석하는 데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의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라면서, 구체적으로 철학 고유의 방법 즉 세계사의 비교형태학을 전개하는 것이 본질적인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서구의 몰락』은 두 권으로 나뉘어 집필되었는데, 제1권에서는 ‘형태와 현실’이라는 주제 아래 세계사에 나타난 고유한 문화군들을 일별하고 그 문화들의 형태에서 출발해 기원까지 분석해 들어가면서 보편적 상징주의의 기초를 마련한다. 제2권에서는 ‘세계사적 전망’이라는 주제 아래 현실 생활의 사건?사실들을 일별한 뒤 보다 높은 단계에 있는 인류의 역사적 실천에서 어떤 경험적 정수를 얻을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서구의 미래를 형성할 것인지를 논한다. 제1권은 1918년 1차 세계대전 중에 출간되었고 제2권은 1922년 1차 세계대전이 완료된 시점에 각각 출간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재한 서구 문화(문명)를 바라볼 때면 슈펭글러의 예언에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그가 당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제국, 나치 정부가 그의 예언대로 몰락했고, 오늘날 세계의 중심축이 서양의 물질문명에서 동양의 정신문화 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와 철학 사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고투했던 슈펭글러의 선구자적 면모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