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나는 남기수와 만나고 있었다.
서로가 가면을 쓴 채, 어떤 의미로 남기수와 나는 순간순간 상대방을 넘겨짚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뒤주 속에 갇힌 것만큼이나 답답한 일이었다. 남기수나 나나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명함에 기재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생활, 그 치명적이고도 거룩한 것. 그러나 거룩하기보다는, 악귀처럼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끝내는 거덜을 내고야 마는 지병 같은 것!
'저는 사실 남형을 잘 모릅니다. 아니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다마다요.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은 어디서 받은지도 모르는 남형의 명함 한 장뿐이었습니다.'
그의 상처난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나는 또 보았다. 내가 그를 유린하고 있었던가. 이 깊디깊은 봄날 저녁 내내.
'하지만 우리들의 만남은 늘 이런 형식을 띠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오늘 저는 그걸 확인했습니다. 내가 먹이를 버는 동안에 만나야 했던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사실은 오늘 우리의 만남과 같았다는 걸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일회용이고 폐기물이고 순종하는 백성이고 또 주검만도 못한 존재들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