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두세번 입을 열까말까한 아버지에게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열살 때까지 유학자 조부의 집에서 자라난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늘 말없던 막내 삼촌의 기억을 떠올린다. 죽은 삼촌에 대한 기억과 은어에 대한 나의 생각과 사랑과 현실에 대한 나의 존재...그 속에서 나는 2년여 동안 부부관계가 없는 아내와 이혼할 결심을 하고, 또 그것을 적극 만류하려는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병환속에서 나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은어-- 짧은 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은어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생을 대표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밀다원의 이층 구석진 자리에서 나는 그녀와 앉아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여전히 청바지는 버리지 못한 채다. 눈은 언제나 도전적이고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가련함 속에는 누구한테서도 볼 수 없는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힘이 숨겨져 있다. 어디까지나 신중하지만 한번 결정하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똑바로 걸어가겠다는 태도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정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받는 상처와 슬픔의 무게가,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 대한 불안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면 첩첩이 안개여서 정체를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맥주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켜면서.
전에 제대하고 가 있던 절에 전활 해두고 왔지. 훌쩍 산으로 다시 올라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육 년 전, 만 십일 개월 동안 나는 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여름에 한번 찾아갈게요.
모르지, 어쩌면 중국 계림(桂林)에 가 있을지도.
저는 맨발로 인도를 일주하고 싶어요. 혜초의 길 따라.
- 본문 중에서